문헌록 전자족보(대동보) > 문헌록
           
1. 문헌 목록 〉10. 10世 〉35. <부정공>양벽정십이경(漾碧亭十二景)
1. 문헌 목록 〉10. 10世 〉37. <부정공>양벽정강안서(漾碧亭講案序)
1. 문헌 목록 > 10. 10世 >  
36.<부정공>서상춘죽계양선조유사(書賞春竹溪兩先祖遺事)
書賞春竹溪兩先祖遺事 孔子曰殷禮吾能言之宋不足徵也文獻不足故也夫子聖人也且殷人也周之去殷又未甚遠也而卒莫之徵者以文獻之不足也吾家家傳舊錄蕩失於壬辰丙燹之中十不存一二幸我族曾祖嵋狂公博雅好古旁搜諸家之集爲一册子藏于家此可謂有足證者矣然而不肖嘗讀賞春竹溪兩先祖遺事獨不能無憾焉賞春府君即我十代祖也龜川公之曾孫也生長於道德節義之家天禀剛明充之以學問平生踐履足以師範一世 宣廟朝有丙子被禍臣后裔存錄之命府君之兄弟及從昆季俱爲參奉然痛傷竹邨龜川兩先祖之慘福無意出世放跡湖山間卜築于谷城之竹谷盖爲其近於先隴也扁堂賞春有詩曰山下長江江上村靑松爲屋竹爲門主人素是疎狂者醒則逍遙醉則昏惜乎全集見失於亂離中而所傳者只此耳小哉然全鼎美味一臠可知此詩雖列於風雅之詠未見其不可者味其意盖不欲爲崖異絕俗之行而清眞灑落之意味未甞不在於其中亦何其多乎哉此吾所以不能無憾於其小者而亦未甞不釋然於其多者焉竹溪府君克承義方之敎在髱齡屹如成人且器宇軒昂文藝夙就七歲賞春府君指天使爲詩輒對曰無天人不生其窮理之學己根於天然矣受業于朴先生訥齋之門文章道德爲世所重然遵父之遺志不事擧子業謝絶榮利生平以小學律己一動靜一語黙不苟也杜門著書以寓其高尚之志實行既至名譽自著道伯薦之屢徵以習讀主薄典薄皆不就平生所蘊不試其萬一識者恨之窃觀近世人苟有一善一行則鮮不衍玉自售者而府君之才之德終身隱晦不露圭角且朝廷方欲起之而猶堅臥不起其所養可知耳完山崔克容氏狀其行卽府君外從侄而所嘗授業者也惟此一狀僅傳於崔氏家藏與賞春府君一絶詩皆足爲後人之眼目亦何恨其遺集之有無也哉 後孫 德浩 謹識 서상춘죽계양선조유사(書賞春竹溪兩先祖遺事) 孔子가 말하기를, 「殷나라의 禮는 내가 말할 수 있으나 宋나라 역사는 문헌이 부족하여 말할 수 없다.」 하였다. 공자는 성인이며 또 은나라 사람이다. 주(周)나라와 은나라가 그렇게 멀지 않는데도 마침내 징험하지 못한 것은 문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옛 가전(家傳)이 임진왜란 때 없어지고 十중 한둘도 전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나의 족증조(族曾祖) 미광공(嵋狂公)은 박아한 군자로 옛 것을 좋아하며 여러 사람들의 문집을 모아 한 책자를 만들어 집에 보관하였으니, 이것이 족히 징험할 수 있는 책이었다. 그래서 내가 일찍이 상춘공·죽계공 두 선조의 유사를 읽고는 느끼는 바가 적지 않았다. 상춘 부군은 나의 十대조이며 귀천공(龜川公)의 증손인데 도덕과 절의 있는 집안에서 출생하여 천품이 강명하였는데 거기다 학문을 하여 평생토록 실천해서 족히 일세의 사범이 되었다. 선조(宣祖) 때 사육신의 난에 죽은 신하의 후손에게 벼슬을 내릴 때 부군의 형제 및 종형제는 모두 참봉이 되었다. 그러나 죽촌(竹村)·귀천(龜川) 두 선조의 참혹한 화를 생각하고는 출세할 생각을 않고 시골에 자취를 감추고는 곡성 죽곡에다 자리 잡고 사니 그곳이 선영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당호(堂號)를 상춘이라 달고는 시를 지었다. 산 밑에 긴 강이요 강 위 마을에 山下長江江上村 소나무로 집을 짓고 대나무 사립문이네. 靑松爲屋竹爲門 주인은 본래 소탈하고 미친 사람 主人素是疎狂者 술 깨면 거닐이고 취하면 잠 자네 醒則逍遙醉則昏 아! 전집(全集)은 모두 난리 중에 없어지고 전해 내려오는 시는 이것뿐이니 어찌 그리 적을까. 그러나 한 솥 안의 고기 맛을 한 점 고기로도 알 수 있으니 이 시를 비록 풍아(風雅)의 시에 편입시킨다 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다. 그 뜻은 대개 홀로 우뚝한 행실을 하고자 아니하고 맑고 시원한 맛이 그 가운데 풍기고 있으니 어찌 그리 훌륭한가. 그래서 내가 그 시문이 적은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또 그 훌륭한 것을 통쾌하게 여기는 바이다. 죽계 부군은 의로운 가르침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마치 어른처럼 의젓하였고 또 기국이 헌칠하고 문예가 일찍 성취되었다. 七세 때 상춘부군이 하늘을 가리키면서 시를 지으라 하니 즉시 「하늘이 없으면 사람이 살지 못한다.」 하였으니 그 학문은 이미 하늘에서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눌재 박상 선생에게서 수업하여 문장과 도덕으로 세상의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과거시험을 공부하지 않고 세상의 영화와 부귀를 탐하지 않았다. 평생 「소학」의 가르침을 따라 한번 움직이거나 말하는 것이 구차하지 않았다. 문을 닫고 책을 저술하여 그 고상한 뜻을 나타내고 고것을 실천에 옮기니 명예가 저절로 드러났다. 도백(道伯)이 천거하여 여러 차례 습독 주부와 전적으로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평생 간직한 포부는 만에 하나도 시험하지 못하니 아는 사람들이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보건대 근세 사람들은 한 가지 선행만 있더라도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세상에 팔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런데 부군은 그 재주와 덕을 숨기고 문행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 조정에서 바야흐로 벼슬로 일으켰지만 그래도 굳게 누워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의 소양을 알 만하다. 완산 최극용 씨가 부군의 행장을 지었으니 바로 부군의 외종질이며 평소 부군에게 수업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최 씨 집에 보관된 가장과 상춘 부군의 시 한 수가 전하여 후세 사람의 안목을 새롭게 하니 그 유집이 전하지 않은 것이 무어 그리 한스럽겠는가. 후손 德浩 삼가 씀
 
1. 문헌 목록 〉10. 10世 〉35. <부정공>양벽정십이경(漾碧亭十二景)
1. 문헌 목록 〉10. 10世 〉37. <부정공>양벽정강안서(漾碧亭講案序)